8월의 6·25전쟁영웅에 백골부대 대대원으로 748고지 탈환에 기여한 김왕호 육군 소령이 선정됐다.그는 갑종장교 1기로 입대, 1950년 10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고, ‘백골부대’로 알려진 제3사단에 배치됐다. 이후 1952년 4월 대위로 진급한 그는 제3사단 22연대 1대대 3중대장에 임명됐다.1952년 9월 양구 북방 주 저항선 상의 748고지, 일명 피의고지를 중공군에 빼앗긴 제3사단은 두 차례의 고지 탈환에 실패하자, 제22연대 1대대를 투입했다. 공격 임무를 부여받은 제3중대장 김왕호 대위(당시 계급)는 정면 공격으로는 고
7월의 6·25전쟁영웅에 6·25전쟁 당시 최전방 기지에 배치돼 수 많은 전과를 올린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2전투비행대대가 선정됐다.비행대대는 실질적으로 전투 임무를 개시한 11월 19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부산 수영, 평양, 수원, 진해, 여의도, 횡성, 오산 비행장 등 최전방기지에 배치돼 지상군 근접 지원, 적 보급로 차단 등을 수행했다.비행대대는 참전 기간 동안 연간 95대의 F-51 무스탕 전투기와 20대의 F-86 세이버제트 전투기를 1만2,405회 출격해 적의 전차 44대와 야포 221문,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독립운동부터 6·25전쟁까지 우리나라 하늘을 굳건히 지켜낸 최용덕 공군 중장이 선정됐다.1898년생인 최용덕 중장은 중국 육군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3·1운동 직후 의열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1920년 그는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들어가 전투기 조종사로 성장했으며, 그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중국 공군으로 복무하며 항일투쟁에 나섰다. 이후 그는 광복군 총무처장과 참모처장 등을 지내며 해방 후 귀국해 공군 창설에 헌신했다. 6·25전쟁 직전 공군사관학교장에 보임된 그는 개전 당시 김포지구 경비사령부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경기도 연천 니키고지에서 신호탄을 쏘아 올려 아군 중대의 역습을 이끌어내 진지를 사수하는데 기여한 송태호 육군 하사가 선정됐다.1951년 6월 입대한 송태호 하사는 제1사단 15연대 수색중대 1소대에서 소총수로 복무했다.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추계공세의 개시와 함께 연대 방어선을 정면에서 포격하고, 수색중대 1소대가 지키던 경기도 연천의 니키고지를 공격해왔다. 송태호 하사 등 소대원들은 중공군을 진지로 끌어들여 섬멸하기 위해 동굴호(湖)에 집결했고, 동굴 안에 엄폐한 소대가 진내사격을 요청했으나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형제의 나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해 장렬하게 전사한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터키 공군 중위가 선정됐다.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1922년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부르사 군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터키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47년 중위로 진급했다.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9월 그는 터키 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해 전방항공통제 임무를 맡았다.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휘관들에게 조종사로서 전쟁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고, 1951년 1월 마침내 조종사로 미 제8군 본부 제452폭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강두형 육군 준장이 선정됐다.1952년 10월 14일 새벽 국군 제2사단은 오성산 남쪽 중공군 전초인 저격능선을 공격했고, 첫 공격에서 저격능선을 탈취했으나 그날 밤 적의 역습으로 저격능선을 빼앗겼다.10월 15일 제17연대 제2대대장이었던 강두령 소령(당시 계급)은 전날 빼앗긴 저격능선 상 ‘A고지’를 공격해 재탈환했다. 그날 밤 적군의 반격이 이어졌고 밀집방어를 했지만 고지를 다시 빼앗겼다.이에 강 소령은 예비중대 1개 소대를 차출해 반격에 나섰고 소대가 분산되고 소대장마저 부상을 입자 강 소령이 직접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전쟁 당시 활약했던 여성의용군이 선정됐다.1950년 9월 육군은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했다. 교육대를 거친 여성들은 국방부, 육군본부, 여군훈련소, 전방 군단 및 사단 등 전후방 각급부대에 배치되어 전투활동,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했다.해병 여군은 6·25전쟁 발발 직후 제주도에서 자원입대한 여교사와 여학생들로 편성됐다. 이들은 진해 해군통제부와 부산의 해군본부에서 행정·보급·정비·간호보조 등의 분야에서 활동했다.공군 여성항공병은 서울 수복 이후 공군본부 참모부서에서 행정보조업무를 수행했다. 한편 육군과 해군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백마고지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정락구 육군 중위가 선정됐다.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 백마고지에서 국군 제9사단이 중국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국군 1만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둔 바 있다.정락구 중위는 6·25전쟁 중인 1952년 갑종장교 제12기를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국군 제9사단 28연대 11중대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1952년 7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백마고지가 한창이던 1952년 10월 13일 정 소위(당시 계급)는 자신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1950년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문경 북쪽의 이화령 일대에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1사단의 남진을 지연시킨 이화령 전투에서 전사한 김용하 육군 소령이 선정됐다.6·25전쟁 초기 제6사단에 배속된 김용하 소령(당시 계급은 대위)은 사단의 소백산맥 방어작전에 따라 제2연대 1대대 중화기중대장으로 문경지역 방어에 투입돼 이화령 전투에 참전했다.이화령 전투에서 제2연대는 북한군에 진지를 빼앗긴 후 역습으로 진지를 탈환했으나 북한군의 공격으로 철수를 단행했고, 김용하 소령은 화력으로 아군 주력의 철수를 엄호했
이달의 전쟁영웅에 장진호 전투에서 흥남 철수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미국 해병 대장이 선정됐다.올리버 프린스 스미스는 6·25전쟁에 미 해병대 제1사단장으로 참전했다.1950년 10월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11월 27일 장진호 주변까지 진격했으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국군의 맹렬한 반격에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놓이자 철수 작전에 돌입했다.1만여 명의 병력과 수많은 피란민, 1,000여 대의 차량과 각종 전투장비의 대대적인 철수를 앞두고, 상부는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수송기로 철수하라 제안했다. 올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경남 함안군 여항지구 전투에서 북한군과 치열하게 교전 중 전사한 허재창 경찰 경감이 선정됐다.함안군 여항지구 전투는 북한군이 마산과 부산으로 진출하기 위해 낙동강 서쪽의 해안지역을 사방으로 연결하는 교통요충지인 함안을 점령하려던 것을 미군과 국군, 경찰병력이 합세해 저지한 전투다. 이로써 부산을 향한 교두보를 내주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허 경감은 전북 경찰국 순창경찰서에서 경사로 근무하던 중 1950년 7월 함안군 여항지구에서 전북 경찰국 소속 약 4,000명으로 편성된 혼성 경찰 인원으로 미 제25사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홍창원 육군 중위가 선정됐다.수도고지 전투는 국군 제2군단 예하의 수도사단이 1952년 7월 7일부터 10월 14일까지 중동부 전선인 강원도 금성군 원덕면과 임남면에 위치한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일대에서 중국군 제12군 예하 제31사단과 제35사단과 벌인 고지쟁탈전이다.홍창원 중위는 수도사단 제26연대 5중대 1소대장으로 참전해 수도고지 방어를 위해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선두에서 중국군과 맞섰다. 통신과 퇴로가 두절되고 압도적인 적 규모에 이기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홍창원 중위는 자신과 부대의 희생을 각오하고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은폐된 적의 전차 4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고지를 무사히 탈환하는데 기여한 송효석 육군 일등상사가 선정됐다.1950년 8월 9일 제12연대 2대대와 3대대는 적에게 201고지와 369고지를 빼앗긴 제13연대 1대대를 증원하기 위해 출동했다. 수암산 쪽으로 진출한 제3대대는 369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적의 전차를 파괴하지 않고는 369고지와 아군 진지를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12연대장이 특공대를 3개조로 편성해 투입했으며 특공대의 활약으로 은폐된 적의 전차 4대를 파괴하고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1951년 참전해 전상 장병들의 치료에 주력하고, 정전협정 체결 후에는 민간인 진료와 치료에 전념한 노르웨이 이동외과 병원(NORMASH : Norwegian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이 선정됐다. 노르웨이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적십자를 통해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했다. 노르웨이 이동외과 병원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연인원 623명이 파견돼 전상 장병들의 치료에 주력하는 한편 민간인 진료에도 최선을 다했다.다수의 의료진들은 근무기간인 6개월이 지난 후에도 복무기간을 연장해 1~2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대한해협 해전을 승리로 이끈 백두산함이 선정됐다.백두산함은 해군장병과 가족들의 성금과 정부 지원금으로 마련한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다. 백두산함은 1950년 6월 25일 동해로 긴급 출항, 대한해협 근해 항해 중 남하하는 적 무장수송선을 발견하고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그 결과 600여 명의 무장병력이 탑승한 적 무장수송선을 침몰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백두산함의 승조원인 전병익 이등병조와 김창학 삼등병조가 전사했다.대한해협 해전은 최초의 해전 승리이자, 백두산함이 유엔군의 해상교통로 보호와 부산교두보
1951년 국군 제6사단은 제2연대를 경계부대로 북한강과 홍천강 남쪽에, 제19연대를 주 방어지역인 용문산 서쪽에, 제7연대를 동쪽에 배치해 결사항전의 전투준비태세를 갖췄다.5월 17일 중공군은 3개 사단을 투입해 군 제6사단에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이어 19일경 3대대 10중대 진지 전방 10~20m 거리까지 접근하며 맹공을 해왔다.당시 제6사단 제2연대 3대대 10중대의 정훈병이었던 서기종 일병은 적의 돌격에 중대장이 일시 후퇴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뛰어나가 소총 사격과 함께 빼앗긴 진지로 달려가며 “중대장님은 건재하다
김용호 중위는 1952년 3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해 장단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해병대 1연대 11중대 3소대장으로 참전했다.당시 장단지구는 서울에서 불과 40여km 거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1952년 3월부터 국군 해병대와 중공군 간 치열한 격전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해 10월 31일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감행 때 김 중위는 장단지구 사천강 지역 전초진지에서 증강된 1개 소대의 병력으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을 맞아 백병전까지 벌이며 결사적으로 진지를 사수했다.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적이 끝내 진지에 난입하자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351고지에서 작전 중 전사한 임택순 공군 대위가 선정됐다.임택순 대위는 1951년 7월 공군사관학교 1기로 졸업해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뛰어난 조종술과 사격술로 항상 편대의 선봉에서 적의 탱크진지 공격과 보급로 차단, 격전 중인 지상군에 대한 근접항공을 지원하는 작전 등에서 눈부신 활약을 선보였다.1953년 3월 6일 그는 적군의 자동화기 진지가 결집돼 있어 동부전선 보급품 집결지로서 매우 중요한 요새였던 강원도 고성 월비산과 351고지에 출격해 아군 제5사단을 위한 근접항공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작전
마량산 전투는 1951년 10월 3일부터 8일까지(1차), 같은 해 11월 4일부터 6일까지(2차) 경기도 연천 임진강 부근 마량산에서 영국군이 중공군과 벌인 전투다.제1차 마량산 전투에서 영연방 제1사단 제28여단 소속 왕립호주연대 제3대대가 전곡 부근 방어선에서 10km 북쪽의 마량산을 점령했다.그러나 이후 중공군은 11월 4일 강력한 포격과 함께 전면 공격을 감행해 제2차 마량산 전투가 시작됐다.제1차 마량산 전투 후 마량산 지역을 인수한 영국 왕립스코틀랜드국경연대 제1대대는 제2차 전투에서 중공군에 밀려 끝내 마량산을 포기할
이달의 전쟁영웅에 피의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기습 공격을 하던 중 적의 포탄 파편을 맞아 쓰러져 3일 만에 전사한 김갑태 육군 중령이 선정됐다.김갑태 중령은 부산에서 출생해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졸업,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그는 1951년 강원도 한석산·가리봉 전투 등에 참여해 공적을 세웠다.1952년 4월 육군 제3사단 22연대 1대대 1중대장으로 부임한 그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북방, 우두산 일대의 방어 임무에 투입됐다.1952년 10월 2일 1중대장 겸 1대대장 대리 임무를 부여받은 김갑태 대위는 선두에서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