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립운동가에 의병으로 구국항일운동에 나섰던 오덕홍(1885∼1909), 김일언(1859∼미상), 정래의(1872∼미상) 의병장이 선정됐다.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시위대 병사들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이후,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확산됐다.오덕홍 의병장은 의병전쟁 마지막 시기 가장 치열했던 전장지에서 활약한 인물로, 1909년 8월 12일 전남 나주 등지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해 일본군을 기습공격하거나 배신자 등을 처단했다.김일언 의병장은 1907년 4월 정용기 의병장이 재기한
6월의 6·25전쟁영웅에 전투 중 목숨을 걸고 유선 통신선 복구에 나섰다 전사한 홍윤조 대한민국 육군 중위가 선정됐다.홍윤조 중위는 1953년 1월 육군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제8사단 제16연대 통신 가설 장교로 임명됐다.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유리한 지형과 작전상 요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부전선에 5개 군단을 투입해 최후 공세를 시작했다.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도처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제8사단 제16연대의 철수계획이 변경됐지만, 예하 1대대는 통신선 단절로 철수계획을 전달받지 못해 고립 위기에 처했다.이에 홍윤조 소위
5월의 독립운동가에 한국 독립을 지원한 가네코 후미코(1903~1926)와 후세 다쓰지(1879~1953) 선생이 선정됐다.1923년 일본 도쿄 간토(관동) 대지진으로 사회가 혼란한 가운데 일제에 의해 조선인·중국인 학살사건이 벌어졌고, 일제는 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고자 당시 폭탄 투척 계획을 세웠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대역사건’ 혐의를 씌워 기소했다.이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투쟁을 벌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수많은 회유에도 전향을 거부하고, 법정에서 조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신을 ‘박문자’라고 밝히
5월의 6·25전쟁영웅에 포로수용소에서 인류애를 실천한 에밀 조세프 카폰(Emil Joseph Kapaun) 미국 군종 신부가 선정됐다.에밀 조세프 카폰 신부는 1950년 7월 미국 군종 신부로 파병됐다.그가 속한 부대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가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한 뒤 중공군에 의해 고립돼 후퇴하게 되자 그는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잔류했다.카폰 신부는 1950년 11월 중공군에 의해 전쟁 포로로 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수용소에서도 그는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부상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음식을 구해오는 등 인
4월의 독립운동가에 청년 외교활동가 이희경(1889~1941)·나용균(1895~1984)·황기환(1886~ 1923) 선생이 선정됐다.이희경 선생은 미국 일리노이대학 의학전문과를 졸업한 후 1919년 4월 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위원장, 법률기초위원, 외무총장대리 등을 역임하며 미국, 러시아 등과의 외교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나용균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 중 1919년 2·8독립선언 발표에 기여했고, 1919년 7월 임시정부에 참여해 국제연맹회의 안건수정특별위원을 지냈다. 또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해 외교 독립운동의 새 방향을
4월의 6·25전쟁영웅에 대한민국 해군 피티(PT, Patrol Torpedo Boat, 어뢰정) 편대가 선정됐다.6·25전쟁 당시 해군은 수심이 얕고 섬이 많은 한반도 해안에서 작전이 편리한 톤수가 적고, 속력이 빠르며, 화력도 강한 함정이 필요했다.해군은 1952년 1월 일본의 미 해군기지에서 피티 4척을 인수해 피티 편대를 창설했다. 당시 피티-23·26 편대는 서해안에서, 피티-25·27 편대는 동해안에서 주로 작전을 수행했다.서해안 피티 편대는 대청도에 기지를 두고 장산곶, 옹진반도, 해주 등 해안에서 활동 중인 적 함선과
3월의 독립운동가에 각지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유관순 열사와 투옥생활을 함께 했던 권애라(1897~1973), 심영식(1887~1983), 임명애(1886~1938), 신관빈(1885~?) 선생이 선정됐다.네 분은 각지에서 3·1운동을 주도했고, 신여성으로서 3·1운동 이후에도 활발한 현실 참여로 여성운동이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으로 자리 잡도록 이끌었다.권애라 선생은 당시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고, 심영식·신관빈 선생은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세 분은 1919년 3월 1일 개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
3월의 6·25전쟁영웅에 알베르토 루이즈 노보아(1917.1.3.~ 2017.1.14.) 콜롬비아 중령이 선정됐다. 알베르토 루이즈 노보아 중령은 1952년 7월 2일 콜롬비아대대 제2대 대대장으로 부임한 후, 7월 13일 강원 철원 탑동 전선에 배치됐다. 탑동 진지는 서북쪽으로 강원 평강, 서남쪽으로 강원 철원, 동북쪽으로 강원 금성에 이르는 철의 삼각지 중앙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노보아 대대장이 지휘한 콜롬비아대대는 1953년 3월 10일 바브라 작전을 통해 중공군 전초진지(180고지)를 역습해 적 방어진지와 화기진지를 전
2월의 독립운동가에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순국한 독립운동가 송몽규, 안창남, 김필순 지사가 선정됐다. 세 분은 각각 문학, 군사, 의학 영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다.송몽규 지사는 윤동주 시인과 함께 한글로 된 시를 문예지에 수록하는 등 민족의식 향상과 민족문화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문학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안창남 지사는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3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하고,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모색하며 반일항쟁에 적극 참여했다.김필순 지사는 중국의 조선인 집단 거주지에 병원을 개설해 의료 활동을 펼
최종성 공군 소위(당시 계급)는 경남 거창 출생으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공군 조종간부 후보생(제1기)으로 입대, 1952년 8월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최종성 소위는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 소속 에프51(F-51)전투기 조종사로 1952년 9월 23일 가평군 현리와 강원도 회양에 있는 적 보급물집적소를 파괴하는 작전에 처음 출격했다.최 소위는 10월에는 16일, 20일, 25일, 27일, 30일 하루 2회씩 출격해 강원도 고성과 원산 등지에서 적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력 집결지와 군용시설을 공격해 적
1월의 독립운동가에 하와이에서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안현경, 이원순 선생이 선정됐다.안현경 선생은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 정치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안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건너가 미주지역 대표 자격으로 활동했고, 1921년 하와이로 돌아와 대한인동지회 창립위원, 하와이 대한인교민단 총무,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집행위원, 동지회 중앙부 대표 등을 맡아 하와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이원순 선생은 1914년 하와이로 망명해 대조선독립단 가입에 이어 대한인동지회에서 외교활동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힘썼
1월의 6·25전쟁영웅에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선정됐다.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6·25전쟁 발발에 따른 유엔의 참전 요청에 따라 벨기에군 700명, 룩셈부르크군 48명으로 ‘제1벨기에 대대’를 편성했고, 벨기에 대대는 1951년 1월 31일 부산에 도착했다.벨기에 대대는 미국 제3사단에 배속돼 1951년 4월 22~25일 임진강 북쪽 금굴산 전투에서 중공군 공세를 이틀에 걸쳐 저지해 영국군이 철수로를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또 1951년 10월 11~13일 강원도 철원의 학당리 전투 등에 참여해 많은 공을 세웠다.특히
12월의 독립운동가에 정미의병 의병장들인 김상태(1885~1911), 신태식(1864~1932), 김동신(1871~ 1933) 선생이 선정됐다.1907년(정미년)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했고, 각 지역에 분산돼 항쟁하던 의병에 해산군인이 합류하며 의병부대 간의 연합과 연계가 추진됐으며, 이는 정미의병으로 명명됐다.당시 김상태 선생은 충북 제천, 청풍, 단양, 영춘 일대의 의병을 규합해 활동했고, 신태식 선생은 경북 문경과 단양 등지에서 의
12월 6·25전쟁영웅에 영국 해병대 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Douglas Burns Drysdale) 대령이 선정됐다.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 대령은 6·25전쟁 당시 영국 제41해병 독립특공대를 지휘하는 특공대장을 맡아 1950년 9월부터 1951년 12월 말까지 참전했다.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 대령과 그가 이끄는 특공대는 북한지역 해안 기습침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적진의 주요시설을 파괴하는데 공을 세웠다.또한 장진호 전투 당시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의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를 이끌고 중공군에 맞서 진격했다
11월의 독립운동가에 중국에서 좌우를 넘어 민족 유일의 독립당 결성을 위해 앞장섰던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연합회(이하 촉성회) 강경선(1891~1930), 박건병(1892~1932), 배천택(1892~미상) 선생이 선정됐다.촉성회 운동은 1920년대 중후반 중국 내 독립운동의 화두로 떠올랐다. 운동공간과 이념, 단체를 불문하고 중국지역에서의 항일에 동조하는 모든 희망을 모아 민족혁명을 지도하는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새로운 움직임 속에서 배천택·박건병 선생은 베이징에서, 강경선 선생은 상하이에서 각각 촉성회 운동에 적극
11월의 6·25전쟁영웅에 평안남도 동양리 전투에서 활약한 이창환(1929.8.5.~1950.11.20.) 하사와 한규택(1930.4.16.~1950.11.20.) 하사가 선정됐다.이창환·한규택 하사는 해병대 3대대 제11중대 소속으로, 1950년 11월 평양-원산 간 도로 차단과 아군의 보급선을 위협하는 적 패잔병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당시 제3대대장은 11월 20일 대대 규모의 패잔병이 평양-원산 간 도로의 요충인 평안남도 양덕군 동양리 일대 장악을 시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제11중대를 출동시켰다.이때 제2분대장이었던
10월의 독립운동가에 동경 지역 유학생을 망라하는 통합·대표 조직단이자 유학생 단체를 넘어 일본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던 동경유학생학우회의 주역 이옥 선생과 유원우 선생이 선정됐다.이옥 선생과 유원우 선생은 각각 안동과 상주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서 유학을 했고, 유학 중에는 학우회 핵심간부를 역임하면서 유학생 운동 뿐 아니라 동경 지역의 한국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이옥 선생은 1923년 관동대지진과 학살의 여파로 활동정지 상태에 있던 유학생 조직을 재건하고, 1920년대 학우회 외에도 다양한 한인 운동단체
10월의 6·25전쟁영웅에 완도 약산전투에서 활약한 경찰 김재봉 경위가 선정됐다.완도 약산전투는 일명 조약도 작전으로도 불리며, 1950년 7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전남경찰국 예하 부대가 북한군 제6사단의 우회 기동 저지를 위해 펼친 서남부지역 유격전 중 장흥 경찰부대가 완도군 약산면에서 벌인 해안방어전투이다.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재봉 경위(당시 계급 경사)를 비롯한 전남 장흥경찰서 소속 70여 명과 지역 방위군 30여 명은 북한군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전남 완도 약산도에서 해안방어 임무를 수행했다.1950년 9월 14일 북한
9월의 독립운동가에 하와이 한인단체 ‘한인합성협회’ 성립의 주역인 안원규, 정원명 선생이 선정됐다. 하와이 각 지방에 조직돼 있던 단체 대표자들은 1907년 정미조약 이후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여러 단체를 통일해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했다. 한인합성협회는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동포들 간 어려움을 먼저 구제하고, 교육에 힘써 문명독립을 목표로 했다.1877년생인 안원규 선생은 1903년 하와이로 이민, 양복점을 운영하며 하와이 한인사회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한인합성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1881년생인 정원명 선생은 190
9월의 6·25전쟁영웅에 여수 철수 작전, 장사 상륙 작전 등 임무에서 활약한 전차상륙함(Landing Ship Tank) 문산호가 선정됐다.문산호는 6·25전쟁 개전 당일 해군 묵호경비부에 징발돼 묵호-포항 간 철수와 복귀 병력을 수송했다. 1950년 7월 27일에는 여수 철수 작전에 참가, 백두산함의 엄호 아래 병력 600여 명과 차량 30여 대를 수송했다.1950년 9월 14일 문산호는 경북 영덕의 장사동 해안에 상륙할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 수송에 참여했다. 841명을 태운 문산호는 부산항을 떠나 미군 함정의 안내로 새벽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