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중공군 공세시 미2사단 23연대전투단과 이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 및 국군1유격중대가 원주 북방의 지평리에서 중공군 3개 사단 규모의 집중공격을 막아내고 승리를 가져온 성공적인 방어전투이다.이 전투에서 미23연대와 프랑스대대, 국군1유격중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하게 됨에 따라 사면 포위에 놓이게 됐다. 하지만 미8군으로부터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면 방어태세로 전환해 완전 고립된 상태에서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4일 동안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이며
낡고 야트막한 건물 가장 안쪽, 볕도 피해갈 것 같은 구석진 공간에 온기라고는 작은 난로 두 대가 돌아갈 뿐인 차가운 사무실 안에서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어주는 ‘모두사랑장애인야간학교’ 주인장을 만났다. 공군 중령 복무 중 뇌종양으로 쓰러져 몸의 절반 이상을 쓸 수 없게 돼버린 오용균 씨.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간신히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사연 많은 ‘야학’선생님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생각했다.“뇌종양으로 쓰러졌을 때가 내 나이 46살이었어요. 곧 진급을 앞둔 전도유망하고 창창한 젊은이였지
흥남철수는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려 북한의 함경도지역에서 북진 중이던 미10군단과 국군1군단이 1950년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흥남을 통해 실시했던 해상철수 작전이다. 흥남철수에서는 한미 양국 군인 10만 명과 북한주민 약 10만 명이 함께 철수했다. 이를 두고 전사가들은 2차대전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독일 구데리안의 전차군단에 쫓겨 던커크(Dunkirk)에서 영국본토로 해상 철수한 ‘던커크 철수작전’에 비유한다. 차이가 있다면 던커크 철수에서는 군인이 대상이었고, 피난민은 한명도 없었다는 점이다.함포사격 지원 속 철수작
“저는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전쟁기념관, 현충원처럼 전쟁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을 방문하면서 전쟁의 끔찍한 참상에 대해서 알게 됐습니다. 너무나 끔찍했고, 무서웠어요. (중략) 우리 국군과 함께 북한에 맞서 싸워준 당신들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한국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를 구해주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유엔군과 국군, 여러분이 진정한 영웅입니다.”여의도 국회의원 회관. 작디작은 학생 하나가 가장 높은 단상 위에 섰다. 장소와 청중들에
이번 호부터 새로운 기획시리즈 ‘6·25전투현장과 호국 영웅들’을 선보인다. 이번 시리즈는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를 중심으로 전장의 이야기, 그 속에 살아 있는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전투현장의 치열하고 생생한 모습에서부터 전투에 참가한 영웅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함께 소개된다.-----------------------------------------------------------------------------------------------------------------------------장진호 전투
전국을 흔들리게 했던 경주 지진이 일어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지난 한 달 경주와 그 인근 지역 주민들의 불안감은 극도에 달했다. 짧은 시간 동안 500회에 가까운 여진에 시달렸고, 때 아닌 태풍을 만나 춥고 어두운 나날이 계속 됐다. 호젓한 보문호와 불국사를 방문하던 관광객도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이렇게 지진과 태풍이 경주를 휩쓸어 시민들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냈다면, 그 할퀴어진 상처를 보듬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다. 특수임무유공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 두 팔을 걷어 부쳤다.굳건히 서라벌을 지
그6·25전쟁은 국제전쟁이면서 후방전쟁이었다. 전선에서는 국군들이 연일 국가수호를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후방의 국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는 생존싸움을 치렀다. 후방에는 힘없고 배고픈 자들이 넘쳐났다. 고향을 버리고 온 피란민,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 가족과 헤어진 노약자들이 거리를 채웠다. 전선은 전국을 강타하며 폐허로 만들었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산업시설과 국가기간시설은 철저히 파괴됐다. 쓸 만한 땅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식량이 나올 농토도 파괴되거나, 남아 있는 농토도 농사지을 장정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서로 잡담을 하고 장난도 치고 있지만, 대열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유니폼을 갖춰 입기는 했는데 가만 보니 교복이 아니라 제복이다. 밝은 표정의 이들은 주니어 ROTC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학생들이다. 주니어 ROTC라는 용어는 아직 조금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만3년이 채 되지 않았다. J-ROTC는 미국 고등학생들이 4년간의 교과과정 중 자발적으로 지원해 참여하는 군사교육 형태의 리더십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5개
“성공확률 5,000대1. 인천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지난 7월 27일 개봉돼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메인 카피다. 다시 맞는 9월 15일. 이날은 인천상륙작전 개시 66주년을 맞는 날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북의 남침으로 터진 6·25전쟁으로 백척간두에 놓였던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인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9월 28일 서울수복으로 이어졌고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대한민국은 기사회생, 다시 승전과 통일의 꿈을 안게 된다. 인천상륙작전 - 영화와 현실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많
전쟁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발생하는 것이 전쟁포로와 전사상자(戰死傷者)다. 6·25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3년 1개월 동안,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며 막대한 부상자가 속출했다. 국군과 유엔참전군의 부상자만 해도 무려 55만 5,022명에 달했다. 지금 대한민국 국군병력과 맞먹는 엄청난 숫자다. 그 가운데 국군 부상자가 45만 742명으로 가장 많았다. 조국을 위해 목숨 내걸고 싸웠다는 증거다. 그 다음이 9만 2,134명의 부상자를 낸 미국이다. ‘혈맹’이 거저 얻어진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다. 이들이 흘린 피가 대한
첫 삽을 뜬 그의 표정이 상기돼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6·25참전용사를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지난 2010년 한국전쟁기념재단(KWMF)을 설립하고 모금활동을 벌여온 지 꼭 6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담긴 표정이 잠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6·25참전용사 아버지를 둔 그 자신도 보훈가족인 재미교포 사업가 김만종 씨를 만났다.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뒤 작은 샌드위치 가게부터 시작해 하나 둘 늘려 현재는 대형 레스토랑을 8개나 보유한 사장님이 됐다. 그는 사업이 조금씩
6·25전쟁은 김일성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됐으나, 이후 유엔회원국이 대거 참전한 세계전쟁이었다. 또한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번째로 일어난 국제 전쟁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혔다. 제2차 대전 이전 규모나 피해로 보아 세계최대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전쟁명칭을 ‘대전쟁(大戰爭, the Great War)’으로 불렀다. 인류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커다란 전쟁이라는 의미에서다. 그 후 그보다 더 큰 전쟁이 1939년 독일에 의해 시작됐다. 이 전쟁은
청소년과 젊은 세대에게 역사는 더 이상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삼국시대, 고려·조선왕조, 근현대사까지 어렵고 복잡하기만 할 뿐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도 별 감동이 없다. 이렇게 외면 받는 우리 역사공부에 불을 지핀 사람이 있다. 역사 교육 강사인 설민석 씨.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감명 받아 국사공부를 시작했다는 그는 재치 있는 입담과 풍부한 지식으로 역사를 대중 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또한 그는 곧 개봉할 영화 ‘인천상륙작전’ 속 역사를 설명하는 강의를 한 후 수익금 전체를 국가보훈처에 기부해 화제가 됐다. - 영화를
지난 제20대 총선에서 각 정당이 제시한 안보 분야 공약에 대한 유권자 인식수준이 크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가보훈처와 한국정치학회가 ‘제20대 총선 정당의 안보 공약에 대한 유권자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확인됐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드에 관한 공약(50.9%)을 제외한 설문조사 공약 모두에 있어서 응답자의 30% 내외만이 정당의 안보공약을 알고 있었다. 특히 ‘평양 남북 경협 사무소 설치(15.7%)’, ‘북한 전역에 대한 감시 및 정찰능력 구비(16.2%)’, ‘장기적으로 국가정보원 폐지 및 대북 정보와 해외 정
국립묘지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애국혼을 적어냈다. 작은 책으로 완성된 지면에는 나라사랑의 정신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피보다 진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마를 줄 모르고 샘솟는다.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의 묘비와 추모비석에 담긴 사연을 정리한 책 ‘님은 조국의 별이 되어’를 펴낸 조재구 한중미디어연구소장을 만났다. 그는 오늘도 50여 분 간 서울현충원 묘역을 돌아보며 각각의 묘비에 담긴 사연을 채록하고서야 일상의 세계로 돌아간다.6월 중순의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서울현충원에서 만난 그는 이곳을 나와 가족,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무궁
전장에서 쓰러진 전우 생각에 가슴 먹먹해지는 계절 “6월이 되면 전투에 나섰다 함께 살아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 생각이 먼저 납니다. 생생했던 전투현장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간 전우는 끝내 고향을 찾지 못했는데, 우리는 또 이렇게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양산이 고향이었던 박규수. 그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전투 당시 저는 파편을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그는 정통으로 총탄을 맞아 쓰러졌습니다. 전우를 업고 후퇴하는데 그는 제 등에서 축 늘어지며 이생과는 이별을 했습니다. 내려놓으니 둘의 몸이 온통 피범벅이더군요. 조용히 얕은 참호에 묻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의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들 중 16개 국가가 전투부대를 파병해 대한민국을 도왔다. 우리나라는 그 중 유독 터키에 대해서만 ‘형제의 나라’라 부르며 각별히 예우하고 있다. 이는 우리 국민들이 2002년 한일월드컵 3, 4위전에서 대한민국과 터키가 맞붙었을 때 터키의 초대형 국기를 흔들며 열정적인 응원과 함께 3위를 터키에게 ‘양보’함으로써 경기장의 감동의 물결로 변했고, 그로인해 ‘형제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양국 국민들의 가슴속에 더욱 깊이 자리 잡게 됐다. 형제의 나라 유래와 터키의 파병그렇다면 형
멀리 풋살장에서부터 뛰어 나오는 모습이 다부지다. 놀랍게도 간호학과에 재학 중인 그는 올해 스물여섯 백석대 3학년에 재학중인 이학도 씨. 바로 그날 오전까지도 중간고사를 치렀다는 그의 표정이 여느 젊은이들과 다를 것 없이 밝다. 그에게 작년 8~11월의 여행도 그런 것이었다. 전역 후 젊은 열정을 확인하기 위한 평범한 여행. 그러나 그는 여행을 ‘참전용사 찾기’라는 주제로 묶었다. “목적이 없으면 지치기 쉽다는 선배의 조언을 새겨듣고 테마를 찾던 중, 작년이 광복 70주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6·25전쟁 65주년인
이제 완연한 봄기운이 스며들어 우리나라에서 봄이 가장 늦게 온다는 강원도에도 작은 꽃망울이 톡 톡 터지기 시작할 때쯤, 만개한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관객들이 원주시청으로 속속 찾아 들었다. 원주지역 중·고등학생 연합 연극단 히스토리메이커의 ‘다시 만날 날까지’ 공연이 있는 날이다. 객석에 불이 꺼지자 어수선했던 장내가 금세 고요해졌다. 이윽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준비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수준급 공연이 펼쳐졌다. 국군의 패기를 표현하는 화려한 군무가 펼쳐질 때면 어김없이 탄성과 박수 세례가 쏟아졌고, 연극이 중반부로 흘러 국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국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연합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국의 영토 주변에 있는 국가들을 차례로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소련은 20세기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완충지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에 소련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그들이 점령한 지역을 공산주의 위성국가로 만들어 갔다. 이른바 공산주의 팽창정책이었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로비아, 북한이 그 희생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