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규 선생은 10대 말부터 노동야학과 사립학교 교사를 역임하다 1913년 이후 일합사,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에 가담해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그 후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1919년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 및 조선독립군정사 조직에 참여해 재무책임자가 됐고, 처조카인 김원봉을 조력자로 삼아 청년결사대 조직인 의열단을 창단했다.선생은 의열단의 국내 적 기관 총공격 거사에 직접 참여하고자 밀입국해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20년 여름에 피체돼 7년 징역형을 받았다. 1926년 봄에 출옥한 선생은 밀양의 지역사회운동에 진력하면서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의대에서 학업을 수행한 후 귀국한 현봉학 박사는 민간인 신분으로 1950년 8월초 미군의 통역관에 임명됐다.그는 미군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낙동강전선에서 진동리 및 통영전투의 승리에 일조하는 등 전장을 누비며 통역을 맡아 우리군의 승리에 기여했다.또한 전선시찰을 위해 사령부를 방문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흥남철수작전에서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 주었다.작전을 책임진 알몬드 소장의 입장에서는 10만여 명에 달하는 미 제10군단 병력
오면직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1920년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안악지국 기자로 활동하다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했다.선생은 1922년 스승인 김구 선생의 권유로 한국노병회에 가입한 후 한국노병회 파견원 신분으로 중국 하남성 군관학교에 입학했다.1931년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 및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했으며, 한·중·일 아나키스트가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에서 기관지인 ‘자유’를 발행했다.선생은 1932년 홍구공원 폭탄 투척 모의에 참가했고, 1933년에는 아리요시 주중일본공사 암살을 시도했다. 1934
강길영 해병 중위는 1949년 4월 15일 처음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 소총병으로 인천상륙작전, 수도 서울 탈환작전 등에 참여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이후 해병간부후보생 제3기로 종합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951년 소위로 임관, 가리산 및 화천지구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그는 1951년 9월 1일에 해병 제1연대 3대대 11중대 선임장교로 강원도 양구 전방의 펀치볼 확보를 위한 전술적 요새인 924고지 전투에 참가해 중대의 선두에서 돌격전을 감행하던 중 적탄에 의해 전사했다.924고지의 공격 과정에서 제11중대는 전진을
이경채 선생은 1924년 광주고보에 진학하면서 식민지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이 시기 민족적 차별, 비교육적 처사 등에 격분해 학생들이 집단적인 등교 거부 투쟁인 동맹휴학을 전개했다.1928년 선생은 광주고보 재학 당시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한 문서 수십 장을 인쇄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 등에 게시했다.선생은 불온 문서 제작 혐의로 일제에 피체됐으나 취조가 끝나기도 전에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선생의 퇴학 처분으로 촉발된 동맹휴학이 광주고보 뿐 아니라 인근 학교로까지 확대됐다.동맹휴학은 학교 내부의 차별에서
1952년 10월 정전협정을 앞두고 철원평야 일대 중부전선의 전략 요충지 백마고지는 6일부터 열흘 동안 무려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백마고지는 철원평야와 고대산 및 아군의 주보급로를 위협하는 중요지역으로서, 제9사단은 장마철이 지나고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자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진지를 보강하던 중 적의 집중적인 기습공격으로 395고지를 피탈 당했다.이에 제9사단 제30연대는 즉각 역습을 실시했으나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중공군의 수류탄 및 기관총사격으로 아군의 피해가 극심해 돌파구 마련에 급급한 상
한징 선생은 1927년 계명구락부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했다가 사전편찬이 중단되자,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했다.1929년부터 1932년까지 이윤재 등과 조선어사전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했고,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가입했다.이후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의 제정과 우리말사전의 편찬에 헌신했다. 선생은 조선어학회가 1934년에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표준어 사정 독회에 모두 참여했다.선생은 1936년
노르망디상륙작전과 함께 대표적인 상륙작전으로 손꼽히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대한민국 해군첩보부대의 헌신적인 활약이 있었다.당시 인천지구에는 북한군 정규 병력이 주둔해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던 가운데 해군정보국첩보대는 X-RAY작전에 참여해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에 잠입했다.이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주 임무로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병력배치 상황, 주둔 병력의 규모와 해안방어태세 등을 파악했다.인천상륙작전이 임박해 영흥도 첩보기지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으나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로
나월환 선생은 중국 상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 헌병학교 및 군관학교 교수를 거쳐 중국군 헌병장교로 복무했다.선생은 1939년 11월 아나키즘에 참여한 인사들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해 일본군 점령지역 내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항일전선에 참여토록 선전·심리전을 전개했다. 한편 중국군민을 대상으로 한 연극공연으로 한·중 공동 항일 유대를 강화토록 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선생은 일부 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1년 1월 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을 이끌고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합류해 초모·선전·첩보·유격전을 전개했
북한의 6·25남침 이후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대전마저 차례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우리군은 8월 1일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낙동강지구전투의 최대 격전지인 다부동 전투, 포항전투, 기계전투, 영천전투 등 낙동강 지구 곳곳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최후의 전투가 연일 벌어졌다.그중에서 기계지역은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도로 상의 요지로서 이를 상실할 경우 동부전선에서 일대 위기를 맞게 되는 요충지였다.강희중 일등중사는 제18연대 1중대 1소대 선임하사로 19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 선생은 조영수호조약이 체결된 1883년 이후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영국인이다.선생은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입국했다.선생은 양기탁과 함께 국한문판 및 순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 활동을 보도하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벌였다.선생은 일제의 사전 검열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는 실을 수 없었던 강력한 반일 논조의 기사를 외국인 신분을 이용해 보도했다. 특히, 고종황제
김용배 육군 준장은 1950년 충북 음성의 동락리 전투에서 적 연대를 격파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50년 10월 6일에는 38선을 돌파 후 초산에 돌입해 10월 25일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로써 김용배 장군 부대는 북쪽 국경선에 가장 먼저 도달한 최선봉부대의 영예를 안았다.1950년 7월 4일 김용배 소령이 속해있는 제7연대는 충주, 장호원 방면으로 남진중인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고 장호원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날 밤 제2대대를 선발대로 출발시켰다. 정찰 중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대원들의 사격이 집중됐고 기습
최중호 선생은 1911년 일제가 항일운동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소위 테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에서 활동했으며, 항일군사 인재 양성을 위해 임시정부가 설립한 육군무관학교에서 수학하는 한편 박은식 선생이 주도한 ‘사민보’ 발간에도 적극 참여했다.1924년 상해대한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돼 교민들의 생활보호를 위해 노력하던 선생은 인성학교 학감으로 취임하면서 한인 자녀를 인재로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또 대한민국임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1군단은 서울을 점령하고, 2군단으로 하여금 춘천-홍천-수원으로 내려와 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북한군 1군단은 서울로 진격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2군단은 춘천으로 진격해 26일 오전 춘천을 점령코자 했다.이때 북한군의 춘천진격을 1시간 이상 저지시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고 국군 제6사단의 주저항선 구축에 기여해 북한군의 계획을 수포로 만든 전투가 1950년 6월 26일의 내평지서 전투다.당시 화천에서 춘천으로 가는 46번 도로 내평리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백초월 선생은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해 해인사에서 경학과정을 마친 후 교종의 최고 단계인 대교사 법계를 받았다. 선생은 기독교와 천도교 등 여타 종교에서는 3·1운동에 적극 가담한데 반해 불교계가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면서 진관사를 비롯한 전국 사찰을 돌며 항일 이념인 일심교를 전파했다. 선생은 중앙학림(현 동국대)내 한국민단본부를 설치해 상해 임시정부 및 독립군에게 제공할 자금을 모금했다.선생은 1919년 단군 건국일을 기념하고 1920년 일본 3·1운동 1주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에 체포됐다. 고문으로 건강이 급격히
1951년 4월 22일 터키 제1여단이 연천 동북방 5km 지점에 위치한 장승천 전투에서 중공군 제60군 예하 제179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는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다섯 번째의 공세로 중공군 참전 이후 최대 병력이 동원된 한반도에서의 마지막 공세이기도 했다.19시경에는 터키 여단이 배치된 대광리 남쪽의 장승천 일대에 40분 동안 전격 준비사격을 했고 이 포격에 포병진지와 통신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적군이 총공격을 시작했을 때, 제9중대 전방 포병관측 장교였던 메흐멧 고넨츠 중위는 무전을 보냈다. “적군은 우리 중대가 주둔
방순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대소련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며, 한국독립당 중경구당 간부, 한국애국부인회 부주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했다.1922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에서 백산소학교의 교사가 되어 재러 한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한인학교 폐쇄 정책에 따라 더 이상 교육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에 뛰어들어 북풍회에 가입하는 등 선전활동에 참여했다.다시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연병호 선생이 독립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면서였다.청년외교단의 외교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활동을 위해 1919년 말 북간도에 근거를 둔 대한정의군정사에 합류해 그 역할을 수행했다.1922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한인사회의 대동단결을 고취하고 청년운동을 활성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1925년 말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에 참가했고,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국제공산당 조직으로부터 군자금을 확보하는 일을 맡았다.1929년 무렵 선생은 남경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혁명당 결성에
중공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서울마저 다시 국군이 수복하자 1951년 4월 총 70만이라는 대병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켜 대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800여 명은 중공군 3개 주력사단 4만 2,000명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맞섰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발이 3일 동안 묶였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안전하게 철수해 수도권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중공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에 맞서 글로스터 대대원 800명중 41명의 전우만이 살아남은 처절한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6·25전쟁 당시 주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미국 전사에서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장군이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 직후 ‘승산이 없는 전쟁이니 동경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참모의 건의를 듣고 곧바로 ‘나는 승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나와 함께 하기 싫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꾼 명장이었다. 그의 아들 지미 밴 플리트 2세도 6·25전쟁에 자원해 B-26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러나 지미 대위는 1952년 4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