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보훈’ 선포 100여 일이 지난 현장에서는 새 정책이 어떤 모습으로 국가유공자의 생활로 다가가고 있을까. 은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많은 국민과 국가유공자의 기대 속에 펼쳐지고 있는 ‘따뜻한 보훈’의 정책현장을 점검한다. 찾아가는 현장 서비스 ‘보비스’에서부터 국가유공자 발굴과 예우, 그리고 영예로운 삶의 마지막 현장까지 이어지는 정책의 현장을 보다 생생하게 취재한다. 23일 오전 8시,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 장례식장. 6·25전쟁에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안정순 국가유공자의 영정과 조화 앞에 일군의 사람들
밝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2층으로 올라서자 현관까지 10여 미터 거리가 남아있는데도 여느 식구 많은 가정집 같은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일요일 오후,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보훈섬김이 정형욱 씨와 김삼길 참전유공자(87세)가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막내딸처럼 일을 성심껏 챙겨줘서 정말 고맙지요. 나이가 많아 혼자서 살림살이를 하기가 어려운데 식구처럼 정리해주고, 이야기 해주고, 반찬도 해주고…. 지내기에 불편한 게 없어요.”“할아버지가 아주 깔끔하고 밝게 사셔서 저도 일하며 힘이 됩니다. 특히
6·25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국군에 의한 38도선 돌파였다. 북한 남침 이후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서울을 탈환하고, 남북 분단의 상징이던 38도선을 돌파했다.그때가 바로 1950년 10월 1일이다. 38도선이 돌파되자 국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38도선 돌파는 누가 보든지 통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때부터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통일에 대한 희망으로 들뜨게 됐다. 그런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불을 확 지핀 것은 바로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남침 이후 동해안에서 악전고투
올해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빠져나간 자리로 맑은 가을하늘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찬바람이 머잖은 계절, 생활이 어려운 국가유공자의 보금자리가 걱정돼 주거환경 개선활동에 참여하며 4년 째 값진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한화 윤이랑 씨. ‘아름다운 청년’, 그가 ‘따뜻한 보훈’의 민간 전령으로 나섰다.그가 참여하고 있는 ‘나라사랑 클린하우스’는 ㈜한화 방산부문에서 국가유공자에게 쾌적하고 편안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으로 참여자들의 열기에 힘입어 지난 2011년부터 7년 째 이어지고 있다. 방위 산업체라는 기업 특성을 살려
6·25전쟁의 최대 변곡점은 인천상륙작전이었다.북한 김일성의 남침 이후 국군과 미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렸다. 그렇게 해서 밀려난 곳이 낙동강전선이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국군과 미군이 싸우고 있는 뒤에는 넘실거리는 남해바다가 있었고, 앞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8월 15일까지 전쟁을 끝내라”며 다그치는 김일성의 독전명령에 따라 공세를 늦추지 않는 북한군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죽느냐, 망명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하든지 아니면 남해
지난 14일, 공주대 재직 중인 한 교수가 10여 년간 모아온 독도 관련 자료 700여 점과 한국근대 관련 자료 400여 점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공주대학교 기계자동차공학부 김남훈 교수다. 독도에 관련한 스토리를 줄줄 꿰고 있는 모습에 역사가 아니면 여타 인문학을 전공한 ‘독서광’일거라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칭 ‘기계쟁이’라는 그는 독도 전문가이자 독도 자료의 체계적 수집에 큰 공을 세웠다.자리에 앉자마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그의 독도 이야기가 쏟아진다.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 독도 시간
국가유공자와 보훈섬김이. 바늘과 실이자, 보비스의 두 주체이다. 함께 가는 이들의 따뜻한 걸음에서 국가보훈이 추구하는 진심어린 예우가 느껴진다. 보비스 10년을 맞아 ‘강산도 변할 10년’ 간 서로 섬기고 정을 나눠온 국가유공자와 보훈섬김이의 삶의 현장을 찾았다. 나라사랑의 현장에서 온몸을 바쳤고, 지금은 세월의 두께 만큼 무거워진 몸으로 삶을 살아가는 고령의 국가유공자, 그 국가유공자의 삶과 생각의 방향을 살피며 따뜻한 이웃으로, 식구로 살아가는 보훈섬김이. 이들이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이야기를 들어본다. 보비스 현장 - 경북 안
6·25전쟁의 최대 위기는 낙동강전투였다. 1950년 8월, 한반도의 10%밖에 남지 않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부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힘겹게 맞서고 있었다.대한민국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미 지상군과 유엔군 일부가 참전했다고는 해도 전세는 쉽게 만회되지 않고, 북한군에게 여전히 밀리는 형국이었다. 맥아더의 유엔군사령부에서는 북한 후방지역의 전략목표에 타격할 B-29와 B-26전략폭격기까지 북한군의 남진 저지에 동원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 격이다. 불리한
무겁게 가라앉은 노인복지센터의 공기를 헤치고 온기를 퍼트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스피커를 꺼내고 신문을 펼치고 스트레칭과 발성을 하며 스스로 기합을 넣으며 준비가 한창이다. 복지센터 어르신들 앞에서 웃음치료를 준비하는 김대화 씨다.다소 무기력하게 앉아 계시던 어르신들은 그가 나타나자마자 그를 알아보곤 저마다 인사를 건넨다. 그는 센터가 떠나가라 ‘안녕하시냐’ 묻는 것도 모자랐는지 어르신 한 분 한 분과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고 때로는 안아드리기도 하면서 눈을 맞추고 인사했다. 여기까지는 리허설. 그의 본격적인 ‘1인
6월 어느 비오는 오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켠에서 자신이 가진 특별한 재능으로 6·25참전용사인 할아버지의 애국심을 추모하는 사람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직접 만든 곡으로 MBC 창작동요제 대상을 수상했고 이제는 정상급 작곡가로 우뚝 선 작곡가 정예경 씨다.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인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할아버지의 삶을 1시간짜리 작은 공연 속에 녹여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문화 공연 프로그램 ‘박물관 춤추고 노래하다’의 기획 프로그램인 이번 공연은 음악과 이야기로 국가유공자 할아버지의 삶을 소개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그가
현충일 추념식에서 국가유공자증 받은 박용규 6·25참전용사 6·25참전용사로, 지난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유공자증을 직접 받은 박용규(88)씨는 그날 이후로 ‘유명인사’가 됐다.불편한 몸으로 추념식에 참석했던 박씨가 국가유공자증을 받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문 대통령이 부축하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새로 국가유공자가 된 이들 중 추념식에 직접 참석하는 것도 영광인데, 식장에서 대통령의 부축을 받으며 따뜻한 위로의 인사를 나눈 것이 알려지자 이웃과 친척으로부터 전화가 쇄도한 것이다.그는 다시 15일 청와대에서
화령장(化寧場) 전투는 1950년 7월 17~21일까지 국군이 소백산맥 일대에서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국군17연대가 상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15사단 예하 2개 연대를 기습 공격해 궤멸적 타격을 입혀 대승을 거둔 전투다.화령장 전투는 국군6사단 7연대의 동락리 전투와 함께 ‘지연작전 2대 대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는 동락리 전투와 화령장전투를 승리로 이끈 연대장 이하 전 장병에게 국군 창설 이래 최초로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수여했다. 화령장 전투는 북한 남침 이후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으로 밀리던 상황에서 국군이
하경희(전몰군경미망인회 원주지회장) “매년 어김없이 돌아오는 호국보훈의 달은 저에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리움’입니다. 국가가 정해준 남편의 두번째 기일인 것 같아 고마운 마음으로 매년 6월을 보내고 있지요.”“결혼하고 나서 남편의 베트남전 파병 시절 일화를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이 너무 생생했지요. 함께 돌아오지 못한 전우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는 저도 슬펐습니다. 남편은 늘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살았습니다.”“남편은 생전 국가관이 아주 뚜렷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어요.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항상 어려운 사람들
한국 해병대는 6·25전쟁을 통해 ‘귀신잡는 해병’과 ‘무적해병’이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국방부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륙작전에 필요한 해병대를 창설했다. 그때가 1949년 4월 15일이다. 창설이후 해병대는 서러움을 많이 당했다. 진해에서 대대규모로 창설된 해병대는 그해 12월 28일 제주도로 이동해 공비토벌에 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그때 해병대는 2개 대대 규모로 1,166명이었다.전쟁 발발 후 해병대는 전북 이리로 출동하여 이곳으로 진출하던 북한군을
순국선열이 잠들어 계시는 현충원은 참배객으로 생기 넘치는 주말과 달리 주중에는 푸른 하늘 아래 고요하다. 뜨거운 햇살이 드리워 경내가 달아오를라 치면 바람이 살짝 묘비를 만지고 지나가는 눈부시게 맑은 날, 고요한 현충원을 깨워 고운 손길로 어루만지는 한 사람을 만났다. 국립대전현충원에서 8년 째 묘역 정리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하태훈 씨가 그 주인공.늘 해오던 당연한 일이 주목받는 것이 어색하다며 연신 말을 아끼던 그는 뜻밖에 아버지 이야기를 담담히 꺼냈다. 황해도 출신의 아버지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모두 참전하셨고, 베트남전
올해는 안중근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107년이 되는 해. 특히 올해 새롭게 재조명되는 안 의사의 삶과 가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지난 3월 27일 대한민국이 봄을 맞이하는 이 때, 마침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는 안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유족과 일반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 자리는 어느 때보다 경건했다. 순국하는 날까지 대한국인으로서의 기개를 지키고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안 의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정신적 귀감이 된다.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조국을 지켰던 그의 용기와 정의, 열정이다. 그의 삶과
국군 6사단은 북한 남침이후 ‘무적의 부대’로 알려졌다. 개전 초기부터 국군 6사단은 북한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춘천 및 홍천전투에서 북한군 2군단을 격파함으로써 수원 이남으로 진출해 한강이북의 국군주력을 격멸하려던 북한군 남침계획을 좌절시켰고, 나아가 육군본부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해 한강선 방어전투를 통해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했다.이후 6사단 7연대는 동락리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 1개 연대를 섬멸함으로써 국군 최초의 대승을 거둬 연대 전 장병 1계급 특진이라는 영예를 누렸고, 낙동강 전선에서는
한 눈에 봐도 전교생이 100명 정도 될까 말까한 작고 아담한 학교, 시원하게 사방이 탁 트인 운동장 한 가운데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버스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이 버스의 겉모습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용하는 버스와 다르지 않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작지만 아늑한 공간 안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은 서로 와글와글 시끄럽다가도 이내 진지해진다. 선생님의 질문에 서로 대답하겠다고 손을 치켜드는 아이들의 눈빛이 형형하다. 충북 청주 행정초등학교에서 열린 나라사랑 꿈나무 이동교실 현장이다. 작년부터 시범
중공군 4월 공세는 30만명을 동원한 대공세였다.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30일까지 전개된 중공군 4월 공세는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 개입 이래 최대 규모였다. 공세목표는 분명했다. 전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빼앗겼던 수도 서울을 다시 되찾겠다는 것이었다.중공군은 1950년 10월 25일 한국전선에 뛰어든 이래 승승장구했다. 한마디로 거침이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이래 38선을 돌파하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향해 쾌속으로 진격해 올라오던 국군과 유엔군을 청천강선으로 밀어낸 다음, 막대한 병력을 앞세워 평양과 흥남에서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 … 3년째 첫 수업 현장으로 대전현충원 찾는 ‘뜻’지난달 3일 대전 화정초등학교 65명 입학생은 조금 특별한 입학식을 가졌다. 설레는 첫 등교 날 학교에서 커다란 태극기와 교표와 태극기 견장이 부착된 모자, 체육복을 선물 받은 것이다. 태극기를 선물로 주는 학교라니. 어딘지 모르게 독특한 입학식의 기획자를 만났다.마지막 수업 종이 울리고 만난 그의 미소는 고요하고 밝았다. 널찍한 교장실에는 놀랍게도 교구와 게임도구들이 정리돼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전교생 하나하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이들이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