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28일 서울 수복으로 인해 갑자기 남쪽에 고립된 북한군은 지리산에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산청경찰서에서 순경으로 근무하던 강삼수는 사찰유격대장으로 임명받고 그 지역 북한군 무장 세력과 빨치산을 소탕하는 등 경찰관으로서 주민과 지리산을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강삼수의 부대는 10명 내외의 인원에도 불구하고 주변 산세의 지형지물과 지리를 철저히 활용해 북한 정예군 출신을 비롯한 수많은 적과의 전투에서 지속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러한 전공이 알려지자 강삼수와 그의 부대
나중소 선생은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1907년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만주로 망명해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 교관으로 초빙돼 수백 명의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같은 해 10월 기존 조직이 북로군정서로 개편되면서 참모부장으로 임명돼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이어 선생은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
1948년 12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해 1949년 소위로 임관, 수도경비사령부 제17연대 11중대장으로 임명된 김동석 대령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제15사단 45연대와의 화령장 전투에서 적군을 궤멸시키는 공적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전 연대원이 1계급 특진의 영광을 누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50년 9월 김 대령은 미8군 정보연락장교로 파견돼 서울 탈환작전을 위한 첩보업무를 담당했다.그가 수집한 적군의 핵심 정보는 맥아더 장군에게 직접 전달돼 아군의 서울 탈환과 북진 작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채광묵 선생은 1896년 김복한 등과 홍주(현 충남 청양)에서 지역 유생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반개화, 반침략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관찰사의 배반으로 의병투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선생은 상경해 도약소를 차리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복수할 것과 친일내각의 외부대신 이완용 등을 탄핵할 것을 상소했다. 선생은 1901년 8월 조정에서 내린 내부주사 직을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영예를 받을 수 없다”며 강하게 거절했고, 1904년에는 일본인 나가모리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김기우 등과 함께 반대 통문을 작성해 배
1950년 8월 남으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은 서해안 연안 가까이에 있는 일부 도서를 점령해 무고한 주민을 학살하고 아군 함정의 동정을 감시하는 거점으로 활용했다. 이에 해군은 인천상륙에 필요한 정보수집과 교두보 확보를 위해 각 함정의 승조원들로 구성된 상륙부대(육전대)를 편성하고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작전을 전개했다. 덕적도는 위치상 인천항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해 먼저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1950년 8월 18일, 아군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덕적도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해군 육전대 1소대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성경여학교에서 공부한 이신애 선생은 1918년 루씨여학교 두산리 분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부흥회에서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선생은 1919년 5월부터 혈성부인회에 가담해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같은 해 9월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해 부인단 총대에 선출됐다. 당시 대동단은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 위해 의친왕 이강을 중국으로 망명시키고자 했다.대동단은 상해 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 등과 연계해 제2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11
1950년 7월 북한군 제2군단은 낙동강 전선을 공격하고 대구와 부산 길목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신속히 포항을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3사단이 이를 저지하는 임무를 받고 보니 포항 북쪽의 영덕과 강구 중간지점의 요충지인 181고지 점령이 최우선 과제였다.뺏고 뺏기며 고지쟁탈을 위한 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중 제3사단은 빼앗긴 181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특공대를 편성하고 아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북한군 전차를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이명수 일등상사는 12명의 대원으로 꾸려진 특공대 대장으로 적진에 침투했다. 이때 특공대에 주어진 무기라
선생은 경기도 양평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화서학파 문하에서 수학했다. 1896년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되던 망국적 위기상황에서 강원도 원주에서 큰 뜻을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이후 제천으로 옮겨 이필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선생은 군중 사무를 총괄하는 군무도유사의 직책을 맡았다. 이때 ‘격고팔도열읍’을 발포해 전 국민에게 의병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호소했다.제천의병은 단양으로 진군해 관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뒀다. 1896년 2월 화서학파의 종장인 의암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선생은 전군
6·25전쟁이 발발한 지 채 일주일도 안 돼, 북한군은 한강을 건너 빠르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러한 적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항공정찰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는 L-5 연락기 12대와 T-6 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전쟁 초기 북한군이 한강철교 도하를 시도하자 공군의 이경복 상사와 백성흠 상사 역시 정찰기에 급조된 폭탄을 싣고 수원기지를 이륙해 흑석동 상공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강 인도교를 발 아래로 보면서 한강철교 쪽으로 기수를 돌려 북쪽 어귀를
문창학 선생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문창범 선생의 사촌동생이다.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간도로 망명해 대한군정서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1921년 1월 2일 선생은 대한군정서 대원들과 함께 웅기항의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일제 군경의 경계가 심해 함경북도 경원군 소재 신건원주재소로 공격목표를 바꿨다. 중국 화룡현을 떠난 대원들은 두만강을 건너 1월 5일 새벽, 신건원주재소에 도착했다. 주재소를 급습한 대원들은 일제 순사를 사살하고 폭탄을 투척해 일경 숙소를 파괴했으며,
마거릿 히긴스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특파원 자격으로 6·25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취재기간 대부분을 최전선에서 보내며 6·25전쟁의 참상과 우리군의 장점과 약점 등을 가감 없이 보도해 6·25전쟁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린 종군기자다. 특히 그는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통영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우리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을 직접 취재하면서 그들의 용맹성을 전 세계에 알린다. 당시 그가 헤럴드 트리뷴 본사에 타전했던 “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병사들은
오영선 선생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사위이다. 어려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으며,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기습공격해 한인 주민 상당수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선생은 연해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이동휘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겼다. 선생은 1920년 임시의정원 경기도의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병키로 하고 해군 프리깃함 2척과 수송선 1척, 공군 수송기 1개 편대, 항공 의무대를 파병부대로 편성하고 끄리앙끄라이 아따난 중령을 파병부대의 대대장으로 임명했다. 아따난 중령이 이끄는 태국 지상군 1개 대대 병력은 16일 간의 항해 끝에 11월 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후 태국군은 평양-수원 철수작전, 상주-문경 주보급로 경비작전, 춘천-화천지구 진격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태국은 한국전쟁시 한국을 지원해 준 아시아 최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박사는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에서 강의하던 중 1916년 11월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부인과 함께 내한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다.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기록으로 남기며 일제의 비인도적 탄압에 맞서 싸웠다. 특히,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를 직접 방문해 참혹한 방화 학살 현장을 촬영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스코필드는 같은 해 5월 직접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당시 수감됐던 유관순 등을 면회한 후 총독부 고위 당국자에게
오금손 대위는 1930년 독립운동가 오수암 선생의 외동딸로 중국 베이징에서 출생했다. 돌이 되기 전에 부모를 잃은 소녀 오금손은 중국인 가정에서 자라다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 항일투쟁의 길로 나서게 된다. 해방 이후 조국에서 개성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개성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오금손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조국을 지키고자 자진 입대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초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던 업무에 임하면서도 오금손은 병원을 기습한 북한군에 당당히 맞서 이를 물리침으로써 2계급 특진, 대
한시대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03년 부모를 따라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부친의 민족의식을 물려받아 3대가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독립운동 가족이다. 1916년 선생은 멘티카에서 부친을 도와 대한인국민회 멘티카 지방회를 설립하면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해져 대한인국민회 주관으로 독립의연금 모금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때 한시대 선생 가족 모두가 적극 동참했다.1924년 경 다뉴바 한인국어학교 교장이 돼 한인 2세의 민족교육에도 힘을 쏟았고 이후 딜레노로 옮겨 부친의 국어학교인
브라이언트 E.무어 장군은 미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마치고 맥아더 사령부의 요청에 의해 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에 1951년 1월 31일 미 제9군단장으로 부임했다.그는 입국과 동시에 썬더볼트 작전에 참가, 중공군과 인민군의 대공세에 맞서 유엔군과 함께 경기도와 서울 남부지역에서 반격을 가하는 등 최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했다.이후 무어장군은 중공군의 4차 공세로 형성된 중동부 전선의 열세지역을 회복하고, 그 지역 내의 적군을 포위하고 격멸하기 위해 다시 킬러작전에 참가했다. 이 작전은 중공군 개입 이후 미8군이 중공군에 대해 실시한 최초의
전투가 한창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던 1953년 6월 26일 강원도 양구 인근, 중공군은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사격 속에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 아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비석고지를 점령했다. 최득수 이등상사가 배속돼 있는 국군 제7사단 8연대 2대대는 백병전까지 치르며 격렬한 반격을 시도했으나 적 수류탄에 대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수차례에 걸친 역습에도 적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으로 우리 측 인명 손실만도 1,3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전투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국군 제7사단 8연대 2대대는
조희제 선생은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 의병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항일의식이 투철한 집안에서 자랐다. 일제에 맞서 목숨을 끊은 송병선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기우만 의병장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선생은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투사들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 항일투쟁 기록을 모았다.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의 재판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했다.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충절을 기록하는데 힘썼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염재야록으로 붙인 책 제목을 덕촌수록이라 이름 붙여 숨겨두었다.그러나 염재
문창범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되자 우수리스크지회 대표로 활약했으며,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1917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돼 러시아 지역 귀화인과 비 귀화인 등 한인사회 결집을 위해 노력했으며, 기관지인 한국어 신문 ‘청구신보’를 간행했다.1919년 2월 니코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대표들이 참석한 전로국내조선인회의를 개최해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개편한 대한국민의회를 창설했다. 이때 선생은 임시정부의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인 대한국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