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정전 및 한미동맹 7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끝)정전협정과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게재된 연간 기획 시리즈 ‘튼튼한 안보, 평화와 미래를 위한 전진’이 독자들의 성원 속에 이번 호로 끝을 맺는다. 10회에 걸친 시리즈를 통해 긴박했던 6·25전쟁의 결정적 장면을 되짚어보는 한편, 전쟁을 통해 맺어진 한미간의 혈맹 관계가 이제는 글로벌 전략적 동맹 관계로 성숙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리즈를 정리하며 정전 및 한미동맹 70년의 역사적 의미와 남겨진 과제를 살펴본다.6·25전쟁과 정전협정2023년은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지난 10월 27일 한반도선진화재단이 주최하고 국가보훈부가 후원한 ‘정전협정·한미동맹 70주년 : 회고와 전망’ 세미나가 열렸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각에서 한미동맹 70주년을 바라본 김학준 인천대학교 이사장의 기조강연을 요약한다.일제의 강점 아래 놓여 있었던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해방되면서 동시에 분단됐다. 당시 진행되던 미·소냉전에 남북 대결이 겹치면서 남에서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북에서는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에 걸친 6·25전쟁으로 국가 기반 시설이 초토화됐던 대한민국은 2023년 현재, 지원을 받던 나라에서 지원하는 나라가 된 유일한 국가, 자생적 민주화에 성공한 민주주의와 인권 지수 상위국, 성공적인 산업화로 G10 경제력을 보유한 국가가 됐다. 이는 1953년 체결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굳건한 안보태세를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한미동맹은 대한민국 발전의 주춧돌이었다. 70년 전 한반도에서의 전쟁 재발 방지 차원에서 맺은 군사안보동맹 관계가 2023년 현재 경제·사회, 문화·기술,
2023년은 6·25전쟁 정전 70주년인 동시에 한미동맹이 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한미동맹은 지난 70년 동안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며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평화를 지켜왔을 뿐 아니라 한국의 경제·사회·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은 군사·안보동맹에서 시작한 한미동맹이 국제질서의 변화와 도전을 극복하며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해온 지난 역사를 짚어보며 앞으로의 미래를 전망한다.70년 전 한국이 한미동맹 체결을 제안했을 때 미국은 다소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이승만 대통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제1사단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일 동안 함경남도 장진군 지역에서 치른 철수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며 승리를 목전에 둔 유엔군은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서 적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했다. 산악지대로 은밀히 침투한 중공군의 매복이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중공군 7개 사단이 겹겹이 펼쳐놓은 포위망을 뚫고 철수에 성공했다. 작전 성공으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이나 지연돼 동북 지방으로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
일제강점기 조국독립을 위해 일신의 안락과 평안을 거부하고 치열하게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는 이 땅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은 제7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간직한 중국의 보훈사적지를 현장 취재했다. 이번 기획에서 국외 독립운동의 최전선기지였던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역사를 안중근 의사, 윤동주 시인, 간도와 일제의 만행을 집중 취재했다.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그리고 여순에서의 최후한여름에 들어선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안중근 의사의 애국혼이 서린 곳이다. 거사를 앞둔 안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한 6·25전쟁. 전쟁 초기 대한민국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으나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반전시켜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유엔군은 재반전에 성공했고 이후 휴전 협상이 시작되면서 전쟁은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하룻밤에도 수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고지 쟁탈전이 시작된 것이다. 여러 고지전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백마고지 전투이다.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제9사단이 1952년 10월 6일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재정비를 마친 유엔군은 반격에 나서 한강 남안에서 대관령까지 전선을 회복했으나 중공군이 대병력을 중동부 전선에 투입하면서 교통과 병참의 요충지인 지평리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유엔군은 1개 연대에 불과한 병력으로 중공군 4개 사단의 인해전술 공격을 격퇴했고 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은 38선 회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중공군 제4차 공세 시 미 제2사단 23연대가 프랑스 대대, 국군1유격중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은 북의 남침으로 백척간두에 놓였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인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확률 5,000대 1’이라 예견됐던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결단이었지만 이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허를 찔렸고 전쟁의 흐름은 완전히 아군에 넘어왔다. 상륙에 성공한 아군은 곧바로 서울을 수복했고 힘겹게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대반격에 나서 38선을 넘어 북진의 기세를 잡을 수 있었다.맥아더 장군 ‘인천’이 최적지 확신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7
작열하는 태양과 포탄의 화염으로 대지가 녹아내리던 1950년 8월의 낙동강 전선.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운 5개 사단을 투입해 파상공세를 가했고 이를 방어하는 한미연합군은 보병, 전차, 포병, 항공이 연결된 입체적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을 저지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한 지역의 주민들도 남녀노소, 너 나 할 것 없이 힘을 보탰다. 다부동 전투는 사투 끝에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지는 반격의 발판을 마련해 최대 고비를 극복한 6·25전쟁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가 됐다.6·25전쟁이 발발하고 채 한 달도 지
우리 전생사의 주요 페이지를 차지하는 춘천 전투는 6·25전쟁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북한의 고속기동부대를 저지해 북한군의 초기 작전계획을 좌절시키고, 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시간을 확보한 역사적 전투로 기록된다. 병력과 장비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전쟁의 흐름을 바꾼 춘천 전투의 전개 과정과 그 의미를 짚어본다.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을 따라 배치돼 있던 북한군의 야포들이 남쪽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면서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됐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티34(T-34) 전차
전쟁은 비극이었고, 참화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 전쟁을 딛고 일어서 오늘의 자랑스러운 선진 대한민국을 일궈냈다. 전쟁이 멈춘 지 70년, 포화는 멈췄지만 긴장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때로는 대결로, 때로는 대화로 한반도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놀라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써왔다. 정전70주년 슬로건 ‘위대한 헌신으로 이룬 놀라운 70년’이 그 내용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우리 신문은 이번호부터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와 공동기획으로 ‘튼튼한 안보, 평화와 미래를 위한 전진’을 싣는다.논어 위정편의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
한미동맹은 한반도 평화 정착과 역내 자유민주주의 발전의 관건이다.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을 통해 튼튼한 안보를 구축했고, 우리는 이를 토대로 성장 발전해 세계 10대 교역국의 지위에 올랐다. 최근 급변하는 동북아 질서는 다시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그 역할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가 함께 '한미동맹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한미동맹 강화 및 한반도 평화 정착 방안'과 '우리나라 국제보훈의 방향'을 심도 있고 논의했다. 이날의 주제발표 내용과 주요 논의를 요약 정리한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환영사한미동
1. 국제보훈사업 현황국제보훈의 대표 사업인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사업은 참전용사를 대한민국으로 초청해서 이분들이 목숨 바쳐 지켰던 나라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보여드리면서, 이분들께 자부심과 보람을 드리기 위한 사업이다. 이 사업은 1975년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모두 3만3,554명의 참전용사와 가족이 참여했다. 이와 함께 해외를 직접 찾아가는 현지 위로·감사 행사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매년 7월 27일에는 유엔군참전의날 기념식, 11월 11일에는 6·25전쟁 당시 전사한 분들이 잠들어 계신 유엔 묘지를 향해서 묵념하는 ‘턴투워드 부산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사람(1) 경찰6·25전쟁 중 경찰은 군인과 함께 전투를 치르거나 각자 근무하던 지역에서 북한군과 싸웠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경찰력은 6만 3,000여 명으로 그중 1만여 명이 사망하고 6,9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내평지서(지구대) 전투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 춘천의 내평지서에서 근무하던 노종해 지서장과 대한 청년단원 3명 등 12명이 압도적 화력과 병력으로 공격을 퍼붓는 북한군과 1시간 이상 교전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켰다. 노종해 지서장을 비롯한 경찰관과 청년단원 9명이 전사했다.
6·25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적인 냉전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남과 북에 각기 분단 정부가 세워지고, 1950년 북한이 무력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한반도는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냉전 속의 열전이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1) 6·25전쟁의 배경1948년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수립된 후 미군과 소련군이 모두 철수했다. 이후 38선 인근에서 남북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준비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구상1937년 중·일 전쟁에 이어 1941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이 패전할 것을 예상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임시정부는 1941년 조소앙이 제창한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이 강령은 임시정부가 광복 후 수립할 민족 국가의 기본 구상을 천명한 것으로 민주주의 확립, 사회 계급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 실현을 주창했다. 새 나라 건설은 ‘독립 선포 - 정부 수립 - 국토 수복·건국’의 순
[ 대한민국임시정부 ]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2) 임시정부의 활동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 정부 장정’으로 경찰이 설치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시기 경찰은 중앙 경찰 기구인 경무국과 교민단 의경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충칭 임시정부 시기 경무과와 경위대 창설로 역할이 증대되었다.임시정부의 경찰은 정부 조직을 수호하고, 교민을 보호하며 국내외 정보를 수집했다. 상하이 시기 프랑스 공무국과 공조하여 일본 밀정을 수색 처단하고 각종 행사, 집회 등의 안전을 담당하였으며, 충칭 임시정부 시기 경위대를 통해
3·1운동1. 3·1운동의 배경1910년대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나 봉건 왕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반제국주의를 외쳤다.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국제 정세는 자유, 정의, 인도, 평화의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같은 국제 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은 유리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적극 활용하여
대한 제국은 일제의 치밀하고 단계적인 침략을 받았다. 일제는 외교와 군사적 방법을 동원해 대한 제국을 압박하였다. 이에 기울어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 운동이 펼쳐졌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국 운동만으로 일제의 침략을 막아 내지는 못하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과 이에 맞서 전개된 구국 운동의 맥락을 살펴보자.1. 민족운동의 개요(1) 국권 회복 운동과 독립운동일제의 침략에 맞선 최초의 항일 투쟁은 망국(亡國)보다 훨씬 이른 1894년 7월